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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단편소설

좋았던 날들

그대들은 이기적이다. 같이 하려 하지 않고 언제나 혼자 있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대들을 조금이라도 침범한다면 불같이 화를 낸다. 그대들의 세계는 언제나 나와 그 외의 것들이다. 그 외의 것들이 그대들이 정한 선을 넘어서도 안 되고, 참견해서도 안 된다. 그대들은 항상 존중받고 싶어 한다. 그대들이 어떻건 간에 말이다. 그러다 존중받지 못한다면 자신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왜? 그대들이 얼마나 떳떳하길래?

그대들은 그런 하루를 보내고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가 전등을 켠다. 외로운 전등이 텅 빈 곳을 비춘다. 그대들은 그대들이 옳았다고 다시 한번 생각하고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조금은 어둡게 비치는 전등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리고 외로움을 느낀다.

나는 책을 덮고, 있던 자리에 다시 꽂아두었다. 책을 다시 꽂는 것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책을 정리하는 것은 그 나름의 규칙이 있어서, 한두 칸 차이 나도 괜찮겠지 생각하고 아무 데나 꽂는다면 사서가 꽤나 고생하기 때문이다.

도서관을 나오자 선선한 여름 막바지의 저녁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내 온몸을 타고 흘렀고, 재킷을 휘날리게 했다. 조금은 큰 재킷 사이로 바람이 구석구석 내 몸을 타고 흐른다. 도서관 계단을 내려오면서 흐른 땀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 시원해졌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갈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대로변에 길게 뻗어있는 하얀 플라타너스 나무 기둥들이 이곳으로 오라고 내게 손짓하는 것 같아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인도에는 내 손바닥보다도 큰 초록빛 플라타너스 잎과 플라타너스 씨앗인지 열매인지 모를 동글동글한 연갈색 알맹이들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 알맹이 하나를 발로 톡 찼다. 알맹이는 데구르르 굴러가다가 작은 턱에 부딪혀 멈춰 섰다.

플라타너스 대로변을 빠져나오면 학원이 많은 거리가 있다. 저녁 이 시간 즈음 되면 키가 작고 너무 어려 보여서 혼자 다닐 수는 있을까 싶은 학생들과, 학생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른 같아 보이는 학생들이 교복 차림에 가방을 메고 한데 섞여 학원 건물을 빠져나와 노란 대형차에 탄다. 나는 그런 모습이 무슨 공장에서 조립된 부품들이 이곳저곳 팔려나가는 것 같이 느껴졌다. 나는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을 생각해보려 했지만 졸업한 지 몇십 년도 더 되어서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저 애들도 몇십 년이 지나면 학교 다니던 시절을 잊어버릴까? 내가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와 전등을 켰다. 해질 녘의 주황빛을 닮은 조명이 좁은 방안을 비추었다. 저번에 새로 산 이 전등은 버튼을 누르지 않고 휴대폰으로 끄고 켤 수 있어, 캄캄한 칠흑 속을 엉기적 엉기적 더듬으면서 전등을 켜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 점이 퍽 마음에 들었다. 재킷을 벗고 얼마 전에 산 턴테이블에 LP판을 끼웠다.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조금 나다가 음악이 흘러나온다. 에릭 사티의 '나는 당신을 원해요'. 프랑스어 원래 발음대로 하면 '주 뜨 브' 이다.

옷을 벗고 샤워를 한다.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시야는 흐려진다. 물 흐르는 소리 속으로 피아노 건반 두드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둥둥둥... 내 몸에 맺힌 물방울들이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난다. 콘서트홀 천장에 달린 주황 조명같이 말이다. 머리 바로 위로 샤워기를 두고 물줄기가 온몸을 타고 흐르게 한다면, 물 흐르는 소리는 관객들의 함성 같이 들린다. 그 속에서 피아니스트가 숨을 깊게 들이켜고 뱉은 다음, 연주를 시작한다. 높은음 건반 한 번, 낮은음 건반 한 번, 관객들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는 가족과 대화하고, 누군가는 연인과, 혹은 친구와 작은 목소리로 대화한다. 그들은 자신의 대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리자 당황하며, 하던 말을 멈추고 조용히 음악을 듣는다. 피아니스트가 약간은 과장된 손짓으로 건반을 두드린다. 그리고 우아한 발길질로 페달을 밟는다. 페달을 밟으면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린다. 덩덩... 나는 혼자 앉아서 피아노 음악을 듣고 있다. 관객석엔 내가 아는 사람이 없고 나를 아는 사람도 없다. 그 순간은 나와, 음악. 그것이 전부이다. 

피아노 연주가 끝나면, 내 샤워도 끝난다. 나는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입은 다음, 쓰레기 봉지를 버리러 밖으로 나갔다. 빵빵한 쓰레기 봉지를 담벼락 구석탱이에 두고 다시 들어가려는데, 내 차 뒤에서 무슨 귀신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차 뒤로 갔다. 엉엉 훌쩍훌쩍 흑흑하며 어떤 긴 머리 여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화단에 앉아 울고 있었다. '귀신인가?' 나는 생각했다.

"저기요?" 내가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저기요?"

내가 다시 물었지만, 여자는 역시 아무 대답이 없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도와드릴까요?"

여자는 아무 대답 없이 계속 울었다.

'도와줘야 하나?'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낯선 이를 함부로 도와주었다가 봉변을 당한 일들을 적잖이 뉴스에서 봐왔기에 포기하고 그냥 들어갔다. 그날 밤, 창문 사이로 그 여자의 우는 소리가 내가 잠들기 전까지 들려왔다.
다음날, 퇴근하고 도서관에 들렀다가 책을 빌린 다음 집으로 향했다. 엉엉 훌쩍훌쩍 흑흑... 그 여자 우는 소리가 다시 내 차 뒤에서 들려온다. '맙소사' 나는 차 뒤로 갔다. 

"저기요?..."

어제 잠옷 차림이었던 그 여자는, 오늘은 얇고 긴 검은색 코드에 검은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있는 자세는 어제와 같았다. 이 여자의 우는 소리를 오늘도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발끝에서 시작해 머리 꼭대기까지 소름이 돋았다.

"무슨 일 있는 거면 경찰에 신고할 수밖에 없어요. 신고해도 될까요?"

여자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저기요"

여자가 울면서 고개를 들었다.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고 콧물도 줄줄 흐르고 있었다.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화장이 온 얼굴에 다 번져 있어서 무슨 위장크림 바른 군인 같았다. 여자가 콧물을 들이마실 때마다 찌든 술 냄새가 확 올라왔다. 나는 그런 여자의 얼굴을 보고 놀라 자빠질 뻔했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놀란 마음 겨우 가다듬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저기요 괜찮..."

내가 말하고 있을 때 여자가 토했다. 토가 온 사방으로 퍼져서 내 자동차 뒤 범퍼와 내 옷과 얼굴, 아까 빌린 책들을 적셨다. 

"으악!" 내가 소리쳤다.

여자는 다시 고개를 깔고 울었다. 나는 엉기적 엉기적거리며 뒤로 살금살금 물러났다. 토 냄새가 사방에서 올라왔다.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정말 이상한 냄새였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이러고 있으면 경찰에 신고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말했다.

"안 돼요.. 신고하지 마세요... 조금만 있다가 들어갈 거에요."

여자가 흐느끼며 말했다. 골목 사이로 찬바람이 흘러왔다.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그런 차가운 바람 말이다. 여자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추워 보였다. 나는 집으로 올라가서 구석에 처박아 놓은 긴 패딩 코트 하나를 가져와 웅크리고 있는 여자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집으로 다시 돌아와서, 얼굴에 묻은 여자의 토사물을 씻고, 옷에 묻은 토사물도 씻어 흘려보냈다. 책에 묻은 건... 도저히 깨끗하게 만들 방법이 없어서 그냥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토사물 냄새가 계속 나서 샤워를 했다. 샤워를 다 하고 나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울고 있던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서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 다음 날, 퇴근을 하고 세차장에 들러 범퍼에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은 토사물을 씻겨냈다. 그리고 서점에 가서 어제 빌렸다가 토사물 범벅이 되어버린 책과 같은 책을 사서 도서관으로 갔다. 

"책이 망가졌어요. 그래서 같은 책으로 사 왔습니다." 내가 사서에게 새 책을 건네며 말했다.

"주원 씨가요?" 사서가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네" 내가 대답했다.

"책을 망가뜨렸어요?" 사서가 물었다.

"네, 맞아요."

"10년 동안 그런 적 없었잖아요. 어쩌다가?"

"음료수를 엎질렀어요."

"그렇구나"

"맞아요."

"주원 씨는 한 번도 책을 망가뜨린 적이 없으니까..."

"음료수 한잔하면서 책 볼 땐 항상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사서에게 인사를 하고 도서관을 나왔다. 화단에 앉아 울고 있는 웬 여자가 나에게 토해서 책이 토사물로 뒤덮였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그다음 날부터 회사 일이 바빠져 수요일과 목요일은 밤을 새고, 금요일과 토요일, 일요일은 새벽까지 일했다. 팀장님은 나에게 월요일과 화요일 휴가를 주었고, 나는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늦은 새벽에 집으로 돌아와 잤다. 

잠에서 깨어났을 땐 저녁 7시 반이었다. 16시간 반을 잔 것이다. 머리가 아파왔다. 약상자를 열어서 타이레놀이 든 종이상자 안을 보았다. 텅 비어있었다. 근처 편의점으로 가 타이레놀 한 상자를 샀다. 그리고 빌라 계단을 올라가는 길에 한 여자를 보았다. 저번 주에 술 먹고 나한테 토한 그 여자였다. 내가 여자를 바라보자 여자도 나를 바라보았고, 혼자 화들짝 놀라더니 쭈뼛쭈뼛하며 멈추어 서선 나를 불렀다.

"저기요..."

"네?"

"저기... 저번 주에... 혹시..."

"네?"

"제가 토했죠?"

"맞아요."

"옷에 다 묻었죠?"

"제 옷 말고, 얼굴에도."

"헉"

"그리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도."

"헉"

"그리고, 제 차 뒤 범퍼에도!"

"헉!"

여자는 어쩔 줄 몰라하는 강아지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괜찮아요. 이미 다 처리했어요."

"비용은요?..."

"얼마 안 들었어요."

"제가 물어드릴게요..."

"괜찮아요."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그럼 밥이라도 한 번 사게 해주세요. 너무 죄송해서요."

"음..."

"별로인가요?"

"아뇨, 괜찮아요. 그렇게 해요."

"그럼 언제 만날까요?" 여자가 대답했다.

"내일 어때요?" 내가 물었다.

"내일 좋아요."

"몇 시에 만날까요."

"퇴근하고 집에 오면 7시쯤 되니까... 7시 10분에 빌라 공동현관 앞에서 만나요."

"좋아요."

나는 집으로 들어가 턴테이블을 켜고 침대에 누웠다. 음악을 들으면서, 여자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볼 걸 생각하고 잠들었다. 

눈을 뜨니 새벽 5시였다. 아침을 먹고 근처 공원에서 조깅한 다음, 집에 들러 샤워를 하고 도서관으로 가서 책을 빌려왔다. 약속 시각 전까지 계속 책을 읽다가 7시에 집에서 나왔다.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옆집 문이 열렸다. 띠리리링 덜컥. 그 여자였다. 여자는 나에게 인사를 했다. 

"같이 내려가요." 여자가 말했다.

"어디 갈 건가요?" 내가 물었다.

"스테이크 먹으러요."

"너무 비싸잖아요"

"괜찮아요. 그냥 스테이크 먹으러 가요. 제가 먹고 싶어요." 여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제 차 타고 갈까요? 아니면 걸어갈까요." 내가 물었다.

"걸어가긴 너무 멀 것 같은데..."

"그럼 차 타고 가요."

"좋아요. 그렇게 해요."

여자가 조수석에 앉았다. 내가 안전벨트를 매라고 말했다. 여자가 안전벨트를 찾지 못해서 내가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우리는 근처 스테이크 가게로 향했다.

"시동도 안 걸었는데 어떻게 차가 움직여요?" 여자가 물었다.

"이건 전기차라서 시동 안 걸어도 돼요." 내가 말했다.

"아..."

"그건 그렇고 이름이 뭐예요?" 내가 물었다.

"하은이요. 이하은"

"그렇군요."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주원이에요. 김주원"

"그렇구나"

어색한 침묵 속에서 건조한 공기가 차 안을 맴돌았다. 

"이제 퇴근하고 오는 길이에요?" 내가 물었다.

"네 맞아요."

"무슨 일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초등학교 교사예요."

"오. 무슨 과목을 가르치시는데요?"

"음악이요."

"아. 음악 선생님이셨구나."

"맞아요, 그런데 주원 씨 음악 좋아하시죠?"

"네, 매일 듣죠."

"에릭 사티 좋아하시죠?"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저녁만 되면 주원 씨 집에서 들리니까요."

"아"

내가 웃었다. 하은 씨도 웃었다.

"많이 시끄럽나요?" 내가 물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집중해서 들으려고 하면 들리는 정도에요."

"다음부턴 헤드셋을 써야겠네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요."

나는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하은 씨와 가게로 갔다. 우리는 종업원이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았다.

"메뉴 정하시면 말씀해주세요." 종업원이 메뉴판을 건네며 말했다.

"저는 스테이크랑 크림 파스타요." 하은 씨가 말했다.

"저도 똑같이 주세요." 내가 말했다.

"고기는 어떻게 드릴까요?" 종업원이 물었다. 나는 처음에 이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미디엄으로 주세요." 하은 씨가 말했다.

"저도요." 내가 말했다.

"아 그리고 샐러드 한 접시도요." 하은 씨가 말했다.

종업원은 알겠다고 말하고는 메뉴판을 들고 주방으로 갔다.

"왜 저랑 똑같이 시키세요?" 하은 씨가 물었다.

"저도 마침 하은 씨가 시킨 대로 먹고 싶었어요." 내가 말했다.

하은 씨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나는 하은 씨를 바라보았다. 천장에 매달린 주황색 조명이 식탁과 하은 씨를 비추고 있었다. 하은 씨는 키가 그리 크지 않았기에 높은 식탁 앞에 앉은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식탁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하은 씨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턱 끝까지 오는 단발머리를 갈색 머리 방울로 묶고 있었는데, 얼굴이 갸름해서 잘 어울렸다. 눈은 크지 않았지만 보기 좋을 정도로 적당했고, 무슨 화장품을 발랐는진 몰라도 눈 주위가 반짝였다. 코도 그리 높진 않았지만 갸름한 얼굴과 잘 어울렸다. 피부가 어두운 편이어서 그녀가 바른 붉은 립스틱이 눈에 확 띄었다. 화려하게 이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수수한 매력이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주원 씨, 저번 주에 옷 더러워진 거 괜찮아졌어요? 이상한 냄새 같은 건 안나요?" 하은 씨가 물었다.

"세탁소에 맡기니까 새 옷처럼 만들어서 주던데요." 내가 대답했다.

"책은 어떻게 됐어요?"

"그냥 새로 사서 도서관에 줬어요."

"책값 드릴까요?"

"아니요. 맛있는 거 사주시니까 괜찮아요. 지금 시킨 게 세탁비랑 책값보다 더 비쌀걸요."

"세차도 하셨잖아요."

"그거 합쳐도 이거보다 싸요."

내 말에 하은 씨가 아하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나쁘셨죠?" 하은 씨가 물었다.

"음..."

나는 잠시 고민했다.

"괜찮아요. 기분 나쁘지 않았어요."

"정말요? 제가 실수했잖아요."

"진짜 괜찮아요. 그런데 무슨 일 있었던 거에요? 토하기 전날에도 밖에서 울고 있었잖아요."

"아..."

"대답하기 그러시면 안 하셔도 돼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음"

"음?"

"얼마 전에 남자친구한테 차였거든요."

"아..."

"그래서 울고 있었어요."

"괜히 물어봤네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은 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얼굴 근육이 어색하게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그때 종업원이 스테이크 두 개를 들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우리 음식인가 봐요." 하은 씨가 말했다.

종업원은 테이블에 스테이크를 내려놓았다. 핏빛이 도는 도끼 모양 고기에서 진한 향이 퍼졌다. 종업원은 다시 주방으로 가 크림 파스타를 가져왔다. 테이블은 음식으로 꽉 찼고, 하은 씨는 음식 사진을 찍었다. 
 
"주원 씨는 안 찍으세요?"

"아, 저도 찍을 거예요." 

나는 사진을 찍은 다음,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스테이크를 썰었다. 내 스테이크를 다 썰고, 하은 씨 스테이크도 썰어주었다. 고기가 질겨서 잘 잘리지 않았다.

"그런데 주원 씨는 무슨 일 하세요?" 하은 씨가 물었다.

"저는 전자책 만드는 회사 다녀요."

"아 휴대폰으로 보는 책 같은 거요?"

"맞아요."

"취미는요?"

"음악 듣는 거 좋아해요."

"저도 음악 듣는 거 좋아해요."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 서로가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했다. 취향이 비슷했다.

"그건 옛날 노래라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하은 씨가 말했다.

"좋은 노래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좋잖아요." 내가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은 씨가 웃었다.

밥을 다 먹고 식당을 나왔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하은 씨가 말했다.

"사실 이 가게, 남자친구랑 자주 왔던 곳이에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와도 괜찮아요?" 내가 물었다.

"뭐가요?"

"그냥 옛날 생각날 것 같아서."

"그래서 온 거예요."

"그래서라뇨?"

"주원 씨랑 오면 남자친구랑 왔다는 게 생각 안 날 것 같아서요."

"그럼 좋은 거예요?"

"그냥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어요."

"뭘요?"

"그 남자랑 사귄걸요."

"왜요?"

"생각나면 힘들어서요."

"많이 사랑했어요?"

"네."

하은 씨가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 비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게 빛났고, 대로변의 가로수 잎은 붉은빛을 발하며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창문 열어주세요." 하은 씨가 말했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하은 씨는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의 갈색 머리가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렸고,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턱선이 드러나 도드라져 보였다. 그녀는 스치는 바람결에 눈이 시렸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파란 하늘빛을 받아 차갑기 빛났다.

"우는 거 아니죠?" 내가 물었다.

"눈이 건조해서 눈물이 나오는 거예요." 그녀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주원 씨"

"네?"

"드라이브하러 가요."

"지금요?"

"네."

"곧 해가 질 텐데요?"

"그래도 가요. 바람 좀 쐬고 싶은데, 전 차가 없어서 어디 가지도 못해요."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음..."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주원 씨 아는 곳 있어요? 조용하고 경치 좋은 곳이요."

"그럼 팔조령 가요."

"팔조령이 어디예요?"

"청도 가는 길에 있는 높은 언덕이에요."

"좋아요. 그러면 거기 가요."

팔조령으로 가는 넓은 도로에 들어섰을 때, 태양은 저 멀리 보이는 산 뒤로 숨어서 연한 파란색 하늘을 진한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하늘은 연한 파란색과 진한 주황색이 한데 섞인 은은한 빛을 내며 이곳을 비췄다. 하은 씨는 창틀에 기대어 창밖으로 지나가는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이 넓은 도로에 차가 한 대도 안 다니네요." 하은 씨가 말했다.

"평일 저녁 도시 외곽이라 그럴 거예요." 내가 말했다.

큰 도로가 끝나고 터널이 있는 곳에서 좌회전했다. 좌회전하면 나오는 좁고 꼬불꼬불한 오르막을 타고 정상에 도착했다. 해는 거의 저물어서 구름 한 점 없는 넓은 남색 하늘의 서쪽 끝자락만이 옅은 주황빛으로 빛났다.
하은 씨는 차에서 내려 청도가 한눈에 보이는 콘크리트 난간에 기대어 섰다.

"주원 씨 여기 와봐요! 저기 청도 맞죠? 청도가 한눈에 보여요."

나는 하은 씨 옆으로 가서 풍경을 바라보았다. 청도 도롯가에서 흘러나오는 가로등 불빛들이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일렁이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게 무슨 별빛 같아요." 하은 씨가 웃으며 말했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려 찰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은 씨의 머리칼이 날렸다. 하은 씨는 조심스럽게 귀 뒤로 머리칼을 넘겼다. 내가 따뜻한 커피 한잔하겠냐고 물었을 때, 하은 씨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주차장 옆 매점으로 가, 따뜻한 캔커피 하나를 사서 하은 씨에게 주었다. 나와 하은 씨는 콘크리트 난간에 서서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하은 씨는 저 같은 낯선 사람이랑 같이 다니는 것에 거부감이 별로 없나 보네요. 우리 제대로 보는 건 오늘 이 처음이잖아요." 내가 물었다.

"사실 주원 씨 몇 번 본적이 있어요."

"정말요?"


"네, 제가 좋아하는 음악들이 옆집에서 흘러나오니까 누가 그런 걸 듣는지 궁금해서 힐끔힐끔 봤죠. 저나 주원 씨 음악 취향이 일반적이진 않잖아요. 주원 씨는 저 본 적 없어요?"

"저는 못 봤어요."

"지금 봤으니까 됐죠?"

"그래요."

"참 신기해요. 저는 살면서 저랑 음악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거든요. 제 남자친구도 제가 듣는 음악에 별 관심이 없었어요. 제가 무슨 노래를 제일 좋아하는지도 모를걸요."

"몇 년 사궜는데요?"

"3년이요"

"3년이나 사궜는데 그거 하나 몰라요?"

"네, 아마 모를 거예요. 음악 듣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한테 그렇게 관심도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도 잘 몰랐어요."

"그런 사람이랑 헤어졌는데도 힘들어요? 오히려 잘된 것 같은데."

"그래도 사랑했으니까요."

"음"

"너무 힘들어요. 학교에서 바쁘게 수업할 땐 생각이 안 나는데, 퇴근하면 생각나요."

"남자친구가요?"

"네."

"하은 씨는 음악 듣는 거 말고 취미 없어요?"

"취미요?"

"네, 퇴근하고도 뭔가 집중해서 하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

"어릴 때 작곡을 했어요."

"작곡 좋네요."

"원래 꿈이 작곡가였거든요."

"그런데 왜 선생님이 된 거예요?"

"재능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도 없어서요."

"에이 그건 모르죠. 다시 시작해봐요."

"그럴까요?"

"네, 작곡하면 저도 들려주세요."

"부끄러워요."

"그래도 들려주세요."

"그렇게 잘하진 못해요."

"괜찮아요. 그냥 취미인데요. 뭘."

"그럼 들려드릴게요."

"좋아요."

"정말 작곡을 하면 괜찮아질까요?"

"집중해서 하는 동안 다른 생각은 안 날 거예요. 그렇게 계속 지내다 보면 괜찮아지겠죠."

"주원 씨도 그런 적 있어요?"

"이별이요?"

"네."

"한 십 년 전에?"

"지금 사귀는 사람은 없구요?"

"네 없어요."

"그때 주원 씨도 뭔가 집중해서 했나 보네요."

"맞아요. 그때 여자친구 만난다고 못 했던 컴퓨터 공부를 해서 취직했죠."

"오 좋은데요?"

"하는 일이 저랑 잘 맞아서 좋아요. 하은 씨는 어때요? 선생님이란 직업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들어요. 애들이 말을 안 들을 때는 좀 힘들지만... 음악을 가르친다는 게 뭔가 뿌듯하고, 피아노 연주하는 것도 좋아요."

"피아노 잘 쳐요?"

"저 음악 선생님이거든요."

"아"

내가 웃었다. 하은 씨도 웃었다. 하은 씨는 커피 한 모금 하면서 날 바라보았다. 나도 하은 씨를 바라보면서 커피 한 모금 마셨다. 해는 완전히 저물어서 주위는 온통 깜깜했다. 매점 아주머니도 가게를 닫는 듯했고, 매점 근처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가고 없었다. 백색 조명 달린 가로등 하나가 외로이 서서 우리 둘을 비추고 있었다. 

"정말 깜깜하네요." 내가 말했다.

"그러게요." 하은 씨가 대답했다.

"저기 별 봐봐요." 내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별이 진짜 많네요." 하은 씨가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거 무슨 별자리인지 아세요?" 내가 물었다.

"음, 알고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요... 아! 백조자리 아니에요?"

"오 맞아요."

"예전에 책에서 본 것 같아요."

"그래도 여긴 도시 근처라 많이 안 보이는 편이에요.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더 많이 보일걸요?"

"은하수도 보일까요?"

"보일 거예요. 겨울이라 희미하겠지만"

"나중에 저랑 같이 갈래요?" 하은 씨가 나를 슬쩍 바라보다가 저 멀리 불빛들로 시선을 옮기면서 물었다.

"좋아요." 내가 말했다.

우리는 커피를 다 마시고 차에 탔다. 하은 씨는 차에 타자마자 잠들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내가 하은 씨를 깨웠고 하은 씨는 하품을 크게 하면서 일어났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주 평일 계속 야근을 하느라 회사에서 잤고, 그래서 하은 씨를 보지 못했다. 전화번호 주고받는 것을 잊어버려서 연락할 수도 없었다.

금요일 저녁 늦게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대충 옷을 벗어 던지고 바로 잤다. 다음 날 점심때 즈음 일어나 밥을 먹으려고 집을 나서는데, 문을 열고 자기 집에서 나오는 하은 씨를 보았다. 내가 하은 씨를 부르자 그녀는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게 달려와 내 앞에 서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내 지저분한 수염과 다 뜨고 떡진 머리카락을 놀렸다. 

"이번 주 계속 회사에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내가 말했다.

"그래서 안 보였군요." 하은 씨가 말했다.

나는 하은 씨에게 어디 가냐고 물었다. 하은 씨는 학교에 간다고 했다. 내가 주말에도 근무하냐고 물었고, 하은 씨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과 약속이 있어서 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같이 가자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말했다.

"좀 씻고 올 테니까 차 안에 있을래요? 10분이면 될 거예요."

"어떻게 10분 만에 외출 준비를 하는 거예요?"

"남자들은 원래 빨리해요."

나는 차 전원을 켜놓고 집으로 돌아가 씻었다. 씻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고 기장이 짧은 연청색 재킷과 검은색 슬랙스를 입고 나왔다. 

"오 멋있어요." 하은 씨가 운전석에 탄 나를 보며 말했다.

"하은 씨도 오늘 이뻐요." 내가 말했다. 하은 씨는 웃었다.

"하은 씨, 차 배터리가 없어요."

"그럼 못가요?"

"충전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학교가 어디예요?"

"여기에요." 하은 씨가 휴대폰을 보여주며 말했다.

"거기 근처에 충전소가 있으니까 거기서 충전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거기까지 갈 배터리는 있어요. 그 학생은 어디서 보기로 했어요?"

"학교에서요."

"밥 안 먹었죠?"

"안 먹었어요."

"그럼 그 학생 데리고 차 충전시켜놓고, 근처에서 같이 밥 먹을까요?"

"좋아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지우한테 물어봐야겠어요."

"지우요? 만나기로 한 학생이에요?"

"맞아요."

"알겠어요, 우선 학교로 갑시다."

우리는 학교로 갔다. 하늘에는 그 전날 종일 비를 내뿜던 먹구름의 잔해가 나지막하게 벽을 치고 있었다. 회색 구름은 바람을 타고 빠르게 움직였는데, 그러다 빈 곳이 생기면 그 사이로 파란 하늘빛과 햇살이 쏟아졌다. 

"아직 먹구름이 있네요." 하은 씨가 말했다.

"그렇네요. 어제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던데... 사무실에서도 비 내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어요." 내가 말했다.

"저는 주원 씨가 안 보여서 뭔 일 있는 줄 알았어요. 비도 많이 오고 그래서..."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나는 하은 씨를 바라보았다. 저번에 만났을 때 보다 화장을 진하게 한 것 같았는데, 나름 잘 어울렸다.

"오늘은 머리 풀었네요." 내가 말했다.

"아 조금 덜 말라서 풀고 나왔어요. 이상해요?"

"그럴 리가요."

"그럼 다행이네요."

"그 가방은 뭐에요? 엄청 작네요." 내가 하은 씨가 매고 있는 작은 아이보리색 가방을 보고 말했다. 파란색과 선홍색으로 포인트를 준 작은 크로스백이었다.

"그냥 이것저것 넣는 가방이에요."

"엄청 작은데 뭐가 들어가긴 해요?"

"화장품이랑 휴대폰이요."

"아하"

"오늘은 날씨가 좋겠죠?" 하은 씨가 물었다.

"뉴스에선 좋을 거라고 했어요."

"전 비 오는 게 싫어요."

"왜요?"

"비가 오면 습해서 머리가 축 늘어지거든요. 특히 앞머리 고데기 했을 때요. 주원 씨는 비 오는 날 좋아해요?"

"옷 젖는 게 싫지만, 비 올 때 냄새는 좋아해요. 특히 비가 한창 내리다가 잠잠해지는 새벽에 밖으로 나가면 젖은 흙냄새가 나거든요. 그게 좋아요. 그리고 비 오는 날 듣는 음악도 좋잖아요."

"그건 저도 좋아해요."

학교 앞에 도착했을 때, 한 아이가 정문 앞에 가방을 메고 서 있었다. 체구가 매고 있는 가방보다 작았다. 연갈색 긴 머리를 묶고 있어서 작은 얼굴이 도드라져 보였는데, 자기 또래로 보이지 않는 성숙한 얼굴이었다.
"지우야, 여기야" 하은 씨가 창문을 내리고 지우를 향해 소리쳤다. 지우는 하은 씨를 보더니, 차로 달려왔다.

"이거 문 어떻게 열어요?" 지우가 말했다.

"손잡이 있는 부분을 톡 건들어봐" 하은 씨가 말했다.

지우는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톡 쳤다. 그러자 문이 열렸다. 지우는 차에 타자마자 선생님에게 "안녕하세요,
선생님." 하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는 누구냐고 물었다.

"선생님 친구야" 하은 씨가 말했다.

"아하" 지우가 말했다.

"지우야. 밥 안 먹었지?" 하은 씨가 물었다.

"네, 안 먹었어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지우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피자요. 엄청 큰 피자"

"피자 괜찮죠?" 하은 씨가 날 보며 물었다.

"그럼요. 근처에 피자가게가 있을거예요."

"지우야, 이 아저씨랑 밥 같이 먹어도 되지?" 하은 씨가 지우에게 물었고, 지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상가와 건물, 식당으로 가득한 거리에 들어섰을 때, 하은 씨가 밖을 바라보며 이곳이 새로 생긴 복합단지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지우는 창밖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스쳐 지나가는 건물들과 사람들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지우야 여기 처음 와보지?" 하은 씨가 물었다.

"네, 처음 와봐요. 깨끗한 건물들이랑 식당이 엄청 많아요." 지우가 대답했다.

나는 충전소에 차를 주차하고 충전기를 꽂았다. 

"몇 분 정도 걸려요?" 하은 씨가 물었다.

"한 40분 정도 걸릴 거에요." 내가 말했다.

"기름 넣는 게 왜 그렇게 오래 걸려요?" 지우가 물었다.

"지우야, 이건 전기차야. 기름 말고 전기로 가는 차." 하은 씨가 말했다. 지우는 "아하" 하고 짧게 대답했다.

우린 근처 피자가게로 향했다. 식당 안은 조용했다. 지우는 메뉴판을 보더니 제일 큰 피자를 찾아 가리켰다. "우린 뭐 먹죠?" 내가 하은 씨에게 물었다. 하은 씨는 이름이 어려운 피자 하나와 스파게티를 가리켰다.

잠시 뒤 음식이 나왔다. 하은 씨가 사진을 찍기도 전에 지우가 피자를 집어 먹었다. 나도 배가 고파서 한 조각 집었다. 하은 씨가 두 조각이 텅 빈 피자 사진을 보고 이게 뭐냐고 말했다. 나와 지우는 웃었다.

"그런데 두 분은 오늘 뭐 하려고 했나요?" 내가 물었다.

"며칠 뒤에 학부모 참관 수업을 하는데, 지우가 그날 무대에서 피아노를 치기로 했어요."

"오, 지우는 피아노를 잘 치나 보네요."

"그럼요. 얼마나 잘 치는데요."

"그럼 오늘은 연습하려고 만난 거예요?"

"맞아요."

나는 지우를 바라보았다. 피자 먹는다고 정신이 없어 보였다.

"지우야. 가방 안엔 뭐가 있니?" 내가 물었다.

"악보에요." 지우가 피자를 씹으며 말했다.

"무슨 노래인데?"

"짐노페디 1번이요."

"오, 아저씨 그 노래 좋아해."

"정말요?"

"응, 자주 들어 진짜야."

"그럼 한 번 흥얼거려봐요."

난 노래를 흥얼거렸다.

"정말 아시네요." 지우가 말했다. 나는 웃었다.

"주원 씨도 그날 와서 지우 연주 들어주면 좋겠다. 그렇지 지우야?" 하은 씨가 말했다.

"음..."

"아저씨 와주면 좋겠지 지우야?" 하은 씨가 다시 말했다.

"아저씨는 노래를 아니까, 그날 오시면 제 연주가 어땠는지 말해주세요." 지우가 말했다.

"주원 씨 올 수 있죠?" 하은 씨가 물었다.

"언제죠?" 내가 물었다.

"다음 주 금요일이에요." 하은 씨가 말했다.

"평일은 출근하는데..."

"아, 그럼 못 와요?"

"그날 휴가 써볼게요."

"좋아요. 휴가 쓸 수 있으면 알려줘요."

"어떻게요?"

"문자로요."

"전화번호도 모르는데요?"

"아 그렇네요."

하은 씨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내가 번호를 적자 하은 씨가 잽싸게 폰을 가져갔다.

"제 번호도 저장해요." 하은 씨가 나에게 전화를 걸며 말했다.

"알겠어요." 내가 말했다.

우린 피자를 다 먹고 식당을 나왔다.

"다음에 선생님이랑 한 번 더 놀러 올까?" 하은 씨가 대로변에 길게 늘어져 있는 건물들을 바라보는 지우를 보며 말했다.

"아저씨도 같이 와요?" 지우가 물었다.

"아저씨도 오라고 할까?" 하은 씨가 말했다.

"마음대로요." 지우가 말했다.

차를 타고 곧장 학교로 갔다. 먹구름이 없어진 하늘 속에서 노란색 따스한 태양이 푸른 상공에 박힌 채 빛을 발했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경비아저씨가 차를 세웠다. 하은 씨가 경비아저씨에게 인사를 하자 아저씨는 우리를 들여보내 주었다. 주차를 하고, 우리는 곧장 강당으로 갔다.

하은 씨가 강당 커튼을 젖혔다. 창문 사이로 쏟아지는 흰색 햇살이 휘날리는 작은 먼지들을 비추었다. 지우는 곧장 무대 위 피아노 앞으로 갔고, 하은 씨는 내게 의자 두 개를 가져오라고 했다. 난 구석에 세워진 의자 두 개를 가지고 하은 씨에게 갔다. 우리는 무대 근처에 앉았다. 지우는 피아노의 현이 있는 부분에 마이크를 갖다 대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악보를 꺼내어 앞에 세웠다. 연주를 시작했다. 피아노 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지우는 몇 살인가요?" 내가 물었다.

"이제 4학년이에요."

"4학년이면 몇 살이죠?"

"11살일 거에요 아마."

"아하"

지우는 계속 연주했다. 녹음한 음반을 틀어놓은 것 마냥 연주의 강약과 리듬, 박자가 완벽했다.

"어떻게 저렇게 칠 수 있는 거죠?" 내가 물었다.

"정말 잘 치죠?" 하은 씨가 말했다.

"피아니스트들 음반이랑 다른게 없는 것 같아요."

"맞아요. 저도 처음 들었을 때, 깜짝 놀랐어요."

"저렇게 어린 나이에 저 정도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게 흔한 건가요?"

"아뇨, 지우 정도면 피아노 몇 년 친 성인들보다도 잘 치는 거예요. 저보다 잘 칠걸요."

"대단하네요."

"지우는 뭔가... 음악을 위해 태어난 아이 같아요. 음감도 뛰어나고, 다른 악기도 잘 다뤄요. 한번은 제가 지우한테 어떻게 그렇게 악기를 잘 다루냐고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지우가 말하길, 자긴 음이 보인데요. 그래서 그냥 자기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악기에서 뿜어져 나오도록 만지는 것뿐이라고 했어요."

"뭔가 신기한데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거예요. 마치 강아지가 자신이 후각으로 보는 세상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해도 사람들은 이해 못 하는 것처럼요. 개들은 냄새로 세상을 본다고 하잖아요. 지우는 음악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거죠. 자기한텐 그렇게 보이니까요. 음악에 대한 열정도 대단해요. 매일 학교 마치고 강당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밤늦게까지 피아노 연주를 하거나 작곡을 하거든요. 그 작은 손으로 악보에 음표를 그리는 게 정말 멋있고, 귀여워요."

"지우 집엔 피아노가 없나 보네요. 이렇게 재능 있는 친군데."

"지우는 보육원에서 지내요."

"아... 음"

"지우 엄마가 고등학생이었다네요. 도저히 아기를 기를 수 없었나 봐요."

"그렇겠네요."

"선생님, 제 연주 듣고 있는 거 맞죠?" 지우가 연주하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어 지우야, 잘 듣고 있어. 계속 연주해줘." 하은 씨가 말했다.

"옆에서 보니까 하은 씨가 지우 엄마 같네요." 내가 말했다.

"저도 가끔은 지우가 제 딸 같아요."

"지우도 하은 씨를 좋아하는 것 같고, 잘 따르네요."

"엄마 아빠가 없으니까 의지할 사람이 필요할 거예요."

하은 씨가 눈물을 흘렸다.

"주원 씨, 지우를 보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저렇게 어리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까요."
하은 씨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지우는 잘할 거에요. 지우를 계속 보다 보니까 자기 또래들과는 다른 어른스러운 면이 보여요. 그러니까 뭐든 잘 해낼 겁니다."

"저도 그렇게 믿어요.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괜찮을 거예요."

지우가 피아노 연주를 멈추고 하은 씨에게 달려왔다. 

"선생님, 무슨 일 있어요?"

지우는 날 노려보았다.

"아저씨가 선생님한테 뭐라고 했어요?" 지우가 말했다.

"아니야, 지우야. 선생님이 지우 연주 듣고 너무 감동 받아서 우는 거야."

"음... 제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아까 페달을 잘못 밟았거든요." 지우가 말했다. 

내가 웃었다. 하은 씨도 눈물을 닦고 웃었다. 지우는 우리가 왜 웃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지우는 해가 반쯤 저물 때까지 연주를 반복했다. 나와 하은 씨가 듣기에 더 이상 잘 치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지우가 연습 다 했으니 집에 가자고 했다.

지우를 데려다주고, 나와 하은 씨는 집으로 향했다. 하늘은 온통 주황빛으로 가득했다.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차가 막혔다. 조금 어두워지자 도로의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하나둘 켜졌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자동차들의 새빨간 브레이크등이 차 안으로 스며들어 우리를 비추었다. 하은 씨의 얼굴이 브레이크등 불빛을 받아 붉게 빛났다. 주황 하늘 배경 아래 헤드라이트 불빛 방울들이 별빛처럼 빛나고 있는 그 속에서, 하은 씨의 얼굴 실루엣이 부드러운 선으로 그려졌다. 

"차가 엄청나게 막히네요." 하은 씨가 말했다.

"다들 어디 놀러 갔다가 오는 길인가 봐요." 내가 말했다.

"저도 어디 놀러 가고 싶어요." 하은 씨가 날 바라보며 말했다.

"어디요?"

"그냥 조용한 곳이요. 도시 말고 시골 같은"

"하은 씨는 차가 없으니까 가기 어렵겠네요."

"그러게요."

하은 씨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만지작 거렸다.

"주원 씨, 배 안 고파요?"

"배고파요. 벌써 저녁 시간이네요."

"저녁 먹으러 갈래요?"

"좋죠.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음, 배는 고픈데 먹고 싶은 건 딱히 없어요."

"그럼 초밥 먹으러 갈까요?"

"좋아요. 저 초밥 좋아해요."

자동차로 꽉 찬 도로 속에서, 꼼짝없이 갇혀버린 우리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주원 씨 음악 들을까요?"

"좋아요. 여기서 한번 골라봐요." 내가 대시보드 터치스크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음... 이 앨범 들을까요?"

"이거 좋죠."

"주원 씨는 저랑 음악 취향이 똑같은 것 같아요. 그래서 신기해요."

"저도 신기해요. 하은 씨처럼 음악을 좋아하고, 또 많이 듣고 많이 아는 사람도 얼마 없을 테니까요."

"고마워요."

하은 씨가 음악을 틀었다. 악기 소리가 차 안에서 나지막하게 맴돌았다.

"하은 씨는 이 앨범에서 무슨 노래를 제일 좋아해요?"

"제목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 제일 긴 노래 있잖아요. 제목도 길고... 그거 제일 좋아해요."

"저도 그 노래 제일 좋아해요."

앨범이 거의 끝나갈 때 즈음, 하은 씨가 나를 바라보았다.

"주원 씨"

"네?"

"내일 저랑 놀러 가요."

"어디요?"

"아침 일찍 나가서 밥 먹고 저녁에 별 보러 가요."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제가 다 찾아놨어요. 이거 봐봐요." 하은 씨가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여기 갔다가 여기 가서 밥 먹고, 여기 또 갔다가 여기 가서 별 봐요. 여기 별이 잘 보인데요." 하은 씨가 휴대폰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괜찮네요. 그런데 내일 비 예보가 있던데요. 그럼 별을 못 볼 거예요."

"아, 그럼 어떡하죠?"

"우선 내일 날씨 보고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봅시다."

"좋아요."

우리는 초밥 식당에 도착했다. 초밥을 먹는 내내 하은 씨는 내 음악 취향에 대해 물어봤다. 이거 들어봤어요? 저거 들어봤어요? 이 가수 알아요? 하고 말이다. 내가 알고 있다고 하면 웃으면서 좋아했고, 모른다고 하면 진지한 표정으로 꼭 들어보라고 했다. 다 먹고 집으로 가는 길엔 비가 쏟아졌다. 어찌나 쏟아지는지 와이퍼가 빠른 속도로 왔다 갔다 하면서 빗물을 쓸어 내려도 내려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내일 비 그치겠죠?" 하은 씨가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내가 말했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창가로 다가가서 하늘을 보았다. 비는 내리지 않았고, 회색 먹구름이 쪼개진 채로 바람에 날려 하늘 이곳저곳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바람이 먹구름을 날려 보내 파란 구멍을 만들면, 그 사이로 하얀 햇살이 쏟아졌다. 씻으려고 화장실로 가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하은 씨 문자였다. 

"주원 씨 일어났어요?"

"네, 일어났어요."

"하늘 봤어요?"

"보고 있었어요. 조금 흐리긴 한데, 시간 지나면 맑아질 것 같아요."

"그렇겠죠? 그럼 나갈까요?"

"네, 나가요. 준비 다 되면 메시지 드릴게요."

"알겠어요. 저도 준비 다 하고 메시지 보낼게요."

나는 다 씻고, 옷장에서 밝은 회색 카디건과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하은 씨에게 문자를 했다.

"하은 씨, 저 준비 다 했어요."

"십 분만 있다가 나와주세요."

나는 십분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하은 씨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진한 색의 기장이 짧은 청재킷과 발목이 보이는 검은 슬랙스를 입고 있었는데, 바지가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을 도드라져 보이게 해주었다. 나는 하은 씨를 바라보았다. 갸름한 얼굴 속 분홍빛 입술이 빛나고 있었고, 진하지 않은 화장을 한 눈망울이 나를 바라보며 빛나고 있었다. 

"오늘은 왜 연청재킷 안 입고 나왔어요?" 하은 씨가 물었다.

"세탁소에 맡겼어요. 너무 오래 입어서." 내가 대답했다.

"아하 그렇구나, 주원 씨는 카디건도 잘 어울리네요."

"고마워요, 하은 씨도 오늘 입은 옷 잘 어울려요."

하은 씨가 웃었다. 우리가 차에 탔을 때, 하은 씨가 계기판을 보더니 배터리가 부족하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하은 씨의 말을 듣고 계기판을 보았다. 79프로였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내가 말했다.

어제 쏟아진 빗물은 도로 곳곳에 작은 물웅덩이를 남겨놓았다. 가을바람이 불어 먹구름 장막에 구멍이 나면 굵은 햇살 줄기가 그 사이로 쏟아져 물웅덩이를 비추었다. 햇살은 받은 물웅덩이는 새벽의 샛별처럼 반짝였다.

"저녁엔 맑아지겠죠?" 하은 씨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점점 맑아지고 있으니까 저녁엔 별들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내가 말했다.

도시를 빠져나와 넓고 조용한 시골 도로를 달릴 때, 하은 씨가 창문을 완전히 내리고 밖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었다. 

"가을 공기가 정말 달콤해요." 하은 씨가 말했다. 나도 창문을 내려서 숨을 크게 들이키고 내뱉었다. "정말이네요." 내가 대답했다. 

도로 건너 길가의 넓은 밭에 심어진 벼들이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춤을 추었다. 벌판이 끝나는 사거리에 다다랐을 때, 양옆으로 큰 가로수가 심어진 좁은 도로 하나가 보였다. 하은 씨는 그 도로를 가리키며 저기로 가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 그곳으로 차를 돌렸다. 차가 좁은 도로에 들어서자, 가로수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쏟아지는 햇살의 그림자가 알록달록한 색을 뿜으며 이곳을 비추었다. 하은 씨는 손바닥을 펴고 손을 스쳐 지나가는 햇살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주원 씨 이거 봐요. 나뭇잎 그림자가 참 이뻐요." 

"그러게요. 이쁘네요." 내가 하은 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주원 씨 근데 있잖아요."

"네?"

"주원 씨를 만나서 같이 이곳저곳 다닌 이후로 우울한 생각이 안 나서 좋아요. 주원 씨랑 같이 있을 때면 기분이 좋아져요. 전엔 제가... 많이 힘들어했잖아요. 알죠?"

"잘 알고 있죠."

"그리고 주원 씨가 말한 대로 바쁘게 무언가를 하니까 확실히 전보다 괜찮아진 것 같아요. 저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 같구요."

"작곡 좀 했어요?"

"네, 좀 했어요. 정말 오랜만에... 교사 되고는 처음 하는 거라 마음대로 되진 않았지만요."

"하은 씨라면 금방 감 잡을 수 있을 거예요. 감 잡고 나중에 완성하면 들려줄 거죠?"

"네, 제가 연주해드릴게요."

"라이브로요?"

"그럼요."

"좋아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리고 주원 씨."

"네?"

"제 실없는 얘기 잘 들어줘서 고마워요. 생각해보니까 주원 씨가 제 얘기 잘 들어줘서 괜찮아진 것 같아요. 듣고 있는 것도 힘들 텐데..."

"힘들다뇨, 절대 안 그래요. 하은 씨가 해주는 얘기가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저랑 취미가 비슷한 사람이랑 얘기해 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하은 씨 얘기 듣고 있으면 저도 막 기분이 좋아지고 그래요."

"정말이에요?"

"그럼요."

"전 제가 하는 얘기가 재미없을까 봐 걱정했어요."

"그런 걱정 안 해두 돼요."

"다행이네요."

저 멀리 도로 끝 언덕 위에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고 지붕이 네모반듯한 흰색 사각형으로 된 건물 하나가 홀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저기에요!" 하은 씨가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건물 밑 주차장에 주차했다. 주차된 차가 좀 있었다. "맛집인가 봐요. 사람들이 꽤 있네요." 내가 말했다. "그런가 봐요." 하은 씨가 대답했다.

우리는 식당으로 올라가서 햇살이 잘 드는 창가 쪽에 앉았다. 앉아 있으니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왔고, 하은 씨는 메뉴판을 꼼꼼히 살피면서 무슨 메뉴가 있는지 내게 말해주었다.

"비빔밥이 맛있어 보여요." 하은 씨가 말했다.

"저도 비빔밥이 먹고 싶어요." 내가 말했다.

"또 저 따라 하는 거예요?" 하은 씨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진짜 먹고 싶어요." 나도 웃으며 말했다.

"불고기 한 접시도 시켜서 나눠 먹을까요?" 하은 씨가 물었다.

"좋아요. 고기도 먹어야죠." 내가 대답했다.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오자 하은 씨는 음식 사진을 찍었다. 나는 하은 씨가 사진을 다 찍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빔밥을 비볐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식당을 나와 근처 편의점에 들러 저녁에 별을 보면서 먹을 과자와 커피를 샀다.

"주원 씨 하늘 봐봐요. 이제 구름 한 점 없어요." 하은 씨가 차 문을 열다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고 창백한 가을 하늘이 끝없이 펼쳐서 있었다.

"오늘 밤은 별을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내가 말했다.

우리는 사방이 붉은 잎사귀로 가득한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 미술관으로 갔다. 미술관은 사방이 단풍나무로 둘러싸인 그렇게 넓지 않은 평평한 잔디밭 위에 있었다. 

"건물이 참 이뻐요." 하은 씨가 미술관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총총 걸어가는 하은 씨를 뒤에서 바라보았다. 그녀가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그녀의 길지 않은 머리칼이 일렁였고, 밖에서 바람이라도 불어올 때면 머리칼은 잔잔하게 물결치면서 하은 씨를 간지럽혔다. 머리칼이 헝클어질 때마다 하은 씨는 작은 귀 사이로 머리칼은 넘겼다. 

"주원 씨 이거 봐봐요. 색깔이 특이해요."

하은 씨가 새하얀 벽에 걸린 큰 그림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은 씨가 그림 앞에 서자, 그림을 비추던 백색 조명이 하은 씨를 비추었다. 하은 씨의 얼굴이 따뜻한 주황빛으로 빛났다. 하은 씨는 그림 앞에 서서 다시 한번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그녀의 머리칼이 다시 한번 일렁였다.

그림들을 다 보고 밖으로 나와 작은 단풍나무 한그루 옆에 외로이 놓여있는 오래된 나무 벤치에 앉았다. 이따금씩 선선한 바람이 어디선가에서 불어와서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는데, 그럴 때마다 단풍나무에 매달려있던 붉은 단풍잎이 한두 개씩 떨어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잔디밭은 그렇게 떨어진 단풍잎으로 가득했다.

"주원 씨."

"네?"

"여기까지 같이 와줘서 고마워요."

"제가 고맙죠, 하은 씨 아니었으면 이런 곳 와보지도 못했을 거예요."

우린 미술관에서 나와 호수로 향했다. 빨간 잎 나무가 가지런히 심어진 대로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 텅 빈 도로를 달리는 동안 저 멀리 산 뒤쪽에서 작은 뭉게구름들이 스멀스멀 피어나 새파란 하늘에 낮게 깔렸다. 끝없이 펼쳐진 도로를 몇십 분 동안 달렸을 때, 길가의 나무 사이로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호수가 보였다. 하은 씨는 창문을 내려 고개를 내밀고 스쳐 지나가는 호수를 보며 내게 소리쳤다. "주원 씨, 저기 봐봐요! 진짜 큰 호수에요." 나는 고개를 돌려 호숫가를 바라보는 하은 씨를 보았다.
나무로 된 다리 입구에 차를 세워놓고, 호숫가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는 나무다리를 걸었다. 호숫가 중간에는 작은 나무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주원 씨 봐봐요. 호수가 정말 커요. 이렇게 큰 호수 본 적 있어요?" 하은 씨가 나무 난간에 기대어 말했다.

"아니요, 이 호수가 제가 본 호수 중에선 제일 큰 것 같아요." 내가 대답했다.

"사진으로 봤을 때도 넓어 보였는데, 직접 와서 보니까 진짜 크네요. 호수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어요. 우리가 너무 작게 느껴지기도 해요." 하은 씨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나를 바라보는 하은 씨 눈망울이 파란 하늘빛을 받아 푸르게 빛났다.

"주원 씨 저기 봐봐요. 호수 중간에 작은 오두막 보여요? 우리 한번 가봐요."

"좋아요."

오두막으로 가는 내내 선선한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와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숨을 깊게 들이쉬다가 내뱉었다. 흡-하, 흡-하 하고 말이다. 숨을 들이쉴 때는 바람의 선선함과 물비린내가 뒤섞여 온몸을 타고 흘렀고, 내뱉을 때는 들이쉰 바람이 따스하게 데워져 내 몸을 빠져나갔다. 

"주원 씨 뭐해요?" 하은 씨가 나를 보며 말했다.

"하은 씨도 나처럼 숨 쉬어봐요."

하은 씨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어때요?" 내가 물었다.

"물비린내가 나요." 하은 씨가 말했다.

우린 넓은 호수를 가로질러 오두막으로 향하는 좁은 다리 위를 걸었다. 우리가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다리가 조금 흔들렸다. "주원 씨, 다리가 무너지는 건 아니겠죠?" 하은 씨가 말했다. 나는 다리 위에서 방방 뛰었다. "주원 씨 그만 해요! 나 무섭단 말이에요." 하은 씨가 다리 난간을 잡으며 말했다. "어때요? 튼튼하죠? 안 무너지니까 걱정  말아요." 내가 말했다. 하은 씨가 달려와 날 때렸다.

오두막은 텅 비어있었다. 문조차 달려있지 않았다. 유리 창문이 있어야 할 부분도 텅 비어 있었다. 구석구석에 거미줄이 있었고, 작은 나무 의자 하나가 낡아서 삭아 문드러진 채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오두막 안은 호수의 파란 물이 비추는 어두운 파란 빛으로 가득했다.

"주원 씨, 이리로 와봐요." 하은 씨가 텅 빈 오두막 중간에 서서 말했다.

"여기 서 있으면 바람 흐르는 소리가 들려요."

나는 바람 흐르는 소리를 들으려 했다.

"잘 안 들려요." 내가 말했다.

"이렇게 하면요?"

하은 씨가 내 앞에 서서 두 손을 뻗어 내 귀를 살포시 덮었다.

"지금은 잘 들려요." 내가 내 귀에 양손을 대고 있는 하은 씨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 없이 오두막을 빠져나와 호숫가 근처 카페로 갔다. 카페는 조금 가파른 언덕 위에 있었기에 창가를 통해 호수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주문한 커피와 치즈케이크가 나왔을 때, 해는 호수를 빙 둘러싼 산 뒤로 숨은 뒤였고, 하늘은 청록색과 주황색이 섞여 반짝였다. 호수의 물은 불어오는 바람에 일렁이며 붉은빛으로 빛났다.

"주원 씨."

"네?"

"고마워요."

"뭐가요?"

"그냥 다요. 주원 씨를 만나고 난 이후로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이제 우울하지도 않아요."

"전 한 게 없어요."

"제 얘기 잘 들어주잖아요. 그렇게 경청해주는 사람 잘 없어요."

"하은 씨가 하는 얘기는 다 재미있어요. 귀여운 구석도 있구요. 그래서 집중하게 돼요."

"정말요?"

"네, 진심이에요."

시간이 지나자 카페에 있던 사람들은 한두 명씩 밖으로 나갔고, 해가 완전히 저물었을 때 즈음엔 아무도 없었다. 직원이 청소하느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소리만이 넓은 카페 안을 맴돌았다.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하은 씨가 말했다.

"벌써 7시네요." 내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주원 씨, 이제 별 보러 가요."

"좋아요."

카페를 나와 별이 잘 보인다는 언덕으로 향했다. 언덕으로 가는 길에 라디오에서, 원하는 기억을 지울 수 있게 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긴 일을 그린 영화 소개가 나왔다.

"하은 씨는 원하는 기억을 골라 지울 수 있다면 할 거예요?"

"음..." 하은 씨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했다.

"아니요, 안 지우고 싶어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서 몸무림치게 되는 그런 기억을 지울 수 있는데두요?"

"네, 안 지울 거에요."

"왜요? 그런 기억들 때문에 힘들어했잖아요."

"그냥... 생각이 바꿨어요. 과거를 내 머릿속에서 없앤다고 정말 없었던 일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벗어나려고, 잊으려고 몸부림 처도 이미 생긴 일은 생긴 일이에요. 그리고...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서, 제가 더 좋은 사람이 될 기회를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어둠에 둘러싸인 높은 언덕 하나가 보였다. 큰 도로에서 빠져나와 어두운 빛깔의 큰 나무들로 둘러싸인 작은 샛길로 들어서니 언덕 입구가 보였다. 우리는 언덕 입구 앞에 차를 세워놓고, 트렁크에서 낮에 산 간식을 꺼내 언덕 정상을 향해 걸어갔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반딧불이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우리가 다가가자 반딧불이는 나와 하은 씨 주위를 맴돌았다. 하은 씨는 반딧불이를 처음 봐서 신기하다고 했다. 우린 잠시 멈춰서서 끼리끼리 모여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를 구경했다. 차가운 저녁 바람이 불어올 때, 반딧불이들은 어딘가로 날아갔고, 우리는 다시 언덕 정상을 향해 걸었다. 정상으로 향하는 흙길은 올라가면 갈수록 양옆에 자란 나무들 때문에 좁아졌고, 나뭇가지가 길을 완전히 막고 있는 부분에 다다랐을 때, 내가 발로 나뭇가지를 밟아 길을 만들었다. 

"하은 씨, 조심해서 들어가요." 내가 나뭇가지들을 손으로 들어 만든 작은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고마워요, 주원 씨도 조심해요." 하은 씨가 말했다.

나무 덩굴을 넘어 바람에 한 올 한 올 흔들리며 파도치는 갈대밭을 지나서야 평평한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숨을 고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가 검은 도화지에 보석을 뿌려 놓은 것처럼 수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주원 씨 하늘에 별이 정말 많아요!" 하은 씨가 신이 나서 말했다.

"이렇게 많은 별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하은 씨가 나를 보며 말했다.

"저도 그래요. 그런데 저거 은하수 아니에요?" 내가 하늘에 새겨진 긴 등뼈 같은 무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은하수 맞는 것 같아요. 정말 신기해요. 하늘에 금이 간 것 같아요."

나는 별빛으로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는 하은 씨를 바라보았다. 하은 씨 눈동자가 별빛을 받아 반짝였다.

"하은 씨"

"네?"

"하은 씨 눈이 별빛으로 가득해요."

내가 반짝이는 하은 씨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원 씨 눈도 별빛으로 가득해요."

하은 씨는 내 귀에 손을 가져다 대고 나를 바라보았다.

"주원 씨."

"네?"

"밤 귀뚜라미 소리 들려요?" 반짝이는 하늘로부터 불어오는 저녁 바람 사이로 귀뚜라미 소리가 작게 섞여 들려왔다.

"들려요." 내가 대답했다.

"주원 씨."

"네."

"어쩜 사람이 이렇게 착하고 멋져요?"

"네? 전 그런 사람 아니에요."

"아니긴요. 주원 씨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

"그런가요?"

"네, 그래요."

하은 씨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내 귀를 감싸고 있던 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곤 날 꼬옥 안았다. 나도 하은 씨를 안았다. 하은 씨의 따뜻한 입김이 우리의 품속으로 흘러 스며들었다. 우리는 별들이 바람에 휩쓸려 반짝이는 하늘 아래에서, 몇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 안고 있었다.

우리가 흩날리는 별빛 속에서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미지근한 저녁 바람결이 반짝이는 별빛을 흔들어 놓았다. 별들은 바람에 휩쓸려 반짝였고, 귀뚜라미는 우는 것을 멈추었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저 멀리 별들만이 아무 소리 없이 빛날 뿐이었다.

하은 씨는 조수석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내가 시동을 걸기 전에, 다시 한번 내게 입을 맞추었다. 나도 하은 씨에게 입 맞추었다.

사방이 어둠으로 가득 차서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곳 말고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고요한 도로를 달릴 때, 내가 음악 하나를 틀었다. 에릭 사티의 짐노페티 1번.

"하은 씨가 좋아하는 노래 틀었어요." 내가 말했다.

"고마워요, 주원 씨." 하은 씨가 대답했다.

차 안을 조용히 맴도는 노래가 거의 끝나갈 즈음, 내가 하은 씨를 불렀다. "하은 씨, 이제 무슨 노래 틀까요?" 그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하은 씨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창가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나는 자는 하은 씨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하은 씨의 이름을 불렀다. "하은 씨..." 그러나 그녀는 잠에 취해 아무 대답도 없었다. 

집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하은 씨를 깨웠다. "하은 씨, 일어나요. 이제 집이에요." 하은 씨는 깜짝 놀라며 깨어났다. 
"제가 언제 잠들었는지도 기억 안 나요." 하은 씨가 말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고 나를 바라보았다.
"주원 씨, 오늘 고생 많았어요. 저랑 같이 가줘서 고마워요." "저도 고마워요. 하은 씨."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이제 들어가요." 하은 씨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그래요." 내가 대답했다. 우리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유난히 따스하던 그 날 밤에, 나는 별빛으로 가득한 갈대밭을 거니는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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